'행동하는 수행자' 명진 스님의 부고가 전해졌다. 해경은 프리다이빙 사고로 추정 발표했지만, 유족 측은 파도 잔잔한 포구 안에서 매일 수영과 얕은 잠수를 하시다 심정지로 변을 당하셨다고 정정했다. 무릎 통증 때문에 5년 전 시작한 바다 수영에서 스님은 호흡 하나하나를 수행으로 여기셨다고 한다.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 문하로 출가해 민주화운동, 종단 개혁, 봉은사, 세월호, 촛불집회까지 늘 사회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그가, 말년엔 결국 가장 단순한 들숨과 날숨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성철 스님의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도 같은 궤적을 보여준다. 처음엔 산을 그냥 산으로 보다가, 수행으로 그 실체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그 깨달음마저 넘어서 다시 있는 그대로의 산으로 돌아오는 것.
삶과 죽음을 서로 반대되는 두 목적지로 나누는 것 자체가 착각이라는 '생사일여'가 여기서 실마리가 된다. 서양에서는 하이데거가 비슷한 결론에 닿았다.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하며,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끌어안을 때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절실하고 진짜인 삶이 된다고 봤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있을 때 나는 없고, 내가 있을 때 죽음은 없다"며 논리적으로는 두려워할 대상이 없다고 했지만, 이는 존재의 소멸 그 자체에 대한 논증일 뿐 죽어가는 과정의 통증과는 별개다.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죽음의 부정》에서 인간 문명 전체를 이 죽음의 공포를 억누르려는 거대한 방어기제로 읽었고, 완화의료 현장 연구들은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실제로 가장 두려워하는 건 죽음 자체보다 통증 관리의 실패, 통제력 상실, 홀로 남겨지는 두려움이라는 걸 보여준다. 불교의 '두 개의 화살' 비유는 이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피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 첫 번째 화살이라면, 거기에 두려움과 저항을 덧붙이는 건 스스로 쏘는 두 번째 화살이다. 붓다조차 음식 중독으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 입적했다고 전해지지만, 두 번째 화살만큼은 수행으로 걷어낼 수 있다는 것. 티베트 불교의 마라나사티(死念)는 이 원리를 실천으로 옮긴다. 죽음을 낯선 미지의 공포로 방치하지 않고 매일 정면으로 들여다보아, 막연한 공포를 구체적이고 익숙한 대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수메르 신화 길가메시도 같은 결로 읽힌다. 그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에 충격받아 불멸을 찾아 떠나지만 끝내 얻지 못하고, 손에 넣은 회춘의 풀마저 목욕하다 뱀에게 빼앗긴다. 그가 정말로 얻은 건 영생의 비법이 아니라 반복된 상실 끝에 도달한 체념 섞인 지혜였다. 지혜는 고통을 건너뛰고 오지 않는다는, 인류 최초의 문학이 남긴 오래된 진실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뜻밖에도 냉수욕으로 다시 몸에 내려앉는다. 온수욕에서 갑작스러운 냉수욕은 '냉각 충격 반응'을 일으켜 심박과 혈압을 위험하게 치솟게 하지만, 온도를 조금씩 낮추면 그 반응 자체가 서서히 무뎌지며 안전하게 내성이 생긴다. 두려운 대상을 한 번에 정면 돌파하기보다 조금씩 익숙하게 만들어가는 마라나사티와 정확히 같은 원리다.
결국 명진 스님이 바다에서 찾던 것도, 붓다의 화살도, 길가메시의 뱀도, 차가운 냉수욕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앞에서 매번 두 번째 화살을 쏠지 말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